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루아르] 샤토의 고장 루아르로 가는 고성 투어

by 아름드리50 2023. 8. 30.
반응형

샹보르성

샤토의 고장 루아르로 가는 고성투어 

샤토(Chateau)라 불리는 프랑스의 고성은 봉건제의 영향으로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지만, 특히 루아르 지방은 아름다운 성들이 집중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 루아르 강은 풍요로운 대지인 프랑스 중서부를 흐르며 블루아, 앙부아즈, 투르, 시농, 오를레앙 등의 도시들을 지난다. 루아르 강과 어우러진 계곡의 경치가 빼어난 루아르 지역은 일찍 부터 프랑스의 정원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고, 예로부터 왕족과 귀족들이 휴양을 위한 성들을 지어 고성이 많기로 유명하다. 고성들은 주로 15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당대의 건축 양식을 드러내며 성마다 개성있게 지어졌다. 현재 약 80여 개가 있으며 박물관으로 이용되어 개방되는 곳도 있지만 후손이 소유해 관람이 불가한 곳도 있다. 색다른 프랑스 여행을 원한다면 와이너리가 아닌 성, 샤토의 고장 루아르로 가 봐야한다. 

440개의 방을 가진 웅장하고 화려한 샹보르성

루아르 지역의 성들 중 가장 크고 유명한 곳이 샹보르 성이다. 큰 공원과 숲으로 둘러 사여있는데 직사각형의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있고, 외성과 내성 각 모퉁이마다 원형탑이 세워져 있다. 여러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실루엣이 겉보기에도 화려한 샹보르 성은 중세 프랑스의 건축 양식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해자와 정찰을 위한 원형탑, 외성과 내성의 구분 등은 방어를 위한 요새의 면모가 살아있는 프랑스 성의 모습이다. 하지만 완벽한 좌우대칭이나 넓은 창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따른 것이다. 내성 중앙의 이중 나선형 계단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다고 전해지는데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않고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화려한 내부에는 샹보르성을 이용한 왕들이 사용했던 침실과 왕관, 초상화들이 전시, 보관되어 있다. 성을 건설한 프랑수와 1세가 사냥용 별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은 그대로 두기엔 아까울 정도. 그래서 프랑수와 1세를 비롯해 이후 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중요 사절을 맞거나 왕실 행사를 열어 권력과 부를 과시했다고 한다. 샹보르 성은 밀라노 공국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519년부터 짓기 시작했지만 워낙 대규모인데다 정치 경제적 상황으로 자주 공사가 중단되어 태양왕 루이 14세때인 1600년대 중반에 완공되었다.완공 이후에도 내부 증축과 개축이 이어졌으며 프랑스 혁명기에는 내부의 장식품과 가구들이 약탈당했으나 외부는 건축 당시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잠들어 있는 앙부아즈 성

요새와 같았던 앙부아즈 성은 15세기 말 대대적인 개축을 통해 프랑스 성 중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가장 많이 반영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수와 1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초청해 머물게 했으며, 피렌체 출신인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시 역시 성에 머물면서 자신의 고향과 같이 꾸미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1516년 초청된 다빈치는 앙부아즈 성과 지하로 연결된 별도의 장소에 머물면서 성의 증,개축에 관여했으며 성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가 사용했던 방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고, 성 안의 교회에 그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성은 계속된 증, 개축으로 르네상스 양식 외에도 외관에는 중세 고딕 양식이 남아 있다. 보기엔 아름답고 화려한 성이지만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심하던 15-16세기 앙부아즈 성은 종교 논쟁에 휘말려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음을 맞은 곳이기도 하다. 

귀부인들의 성 쉬농소

쉬농소 성은 강 위에 다리처럼 세워진 아치형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르네상스와 중세 고딕 건축의 영향을 받은 건물로 본채 모서리에 탑이 있고 3층의 구조로 이루어진 성이다. 쉬농소 성은 중세부터 성채가 들어서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후 여러 여성 성주가 성을 소유하면서 귀부인들의 성이란 별칭이 붙었다. 소유자들이 바뀌면서 건축 양식도 추가되고, 1555년에는 강을 가로지르면서 성과 연결되는 다리를 만들었다. 당시에 다리 위의 회랑은 없었으나 카트린 드 메디시가 소유하면서 회랑 건물을 추가해 지었다. 그 후에도 여러 여주인을 거치면서 루소, 볼테르 등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살롱문화를 만들어 갔다. 

반응형